자유 게시판
[공모전] 릴리스 이야기(소설)
- 2019.10.2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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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어미의 품에 아이가 얼굴을 묻듯 파티의 이빨이 릴린의 목에 파묻힌다. 어미의 품에 안긴 아이는 릴린의 입술과 심장 사이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고, 균열이 이끌어낸 틈새는 하늘을 가뿐히 뒤덮을 기세의 마기를 흘려내었다. 흘러진 마기의 아지랑이는 땅에 뿌리를 내려 모두가 발 디딜 틈이 없게 하였고, 시리앙마르의 웅장하기로 소문난 세 여신의 신전보다 두어배는 더 큰 기둥을 세워 모두의 정신을 앗아갔으며, 기둥이 하늘에 손을 뻗어 만들어낸 가지의 울창함이 빛을 모조리 삼켜 진작에 모두의 시선을 지웠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오직 세가지. 가지에 맺힌 열매와, 그 열매를 감싼 뱀. 그리고 그 열매가 마치 심장처럼 소스라치게 펄떡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 고블린 레이드/릴린의 환영 中
***
태초에 어느 신이 흙을 빚어 남녀 한 쌍을 창조하였으니, 남자의 이름은 아담이고 여자는 릴리스였다.
아담을 위해 신들은 동산 에덴을 만들었고, 아담은 그곳에서 탐스런 열매를 먹고 동물들이 바치는 고기를 먹으며 충족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담은 그를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모두 짝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에게도 짝을 만들어 달라 간청했다.
신은 아담을 사랑했기에 그의 간청을 들어주고자 또다른 흙을 빚어 황금발의 여자를 만들어내니, 그 이름이 릴리스다.
"릴리스, 저기 저 사과를 따 와. 파루테에게 주면 안 짖더라고?"
"어디서 말대꾸야? 버릇없기는."
"이러지 말아요. 아담! 오늘은 도저히.."
"내가 하고싶다면 하는거지. 앙탈은 그만 부려라."
그러나 아담에게 릴리스는 반려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으니까, 정말로 구색을 맞추기 위한 짝이었을 뿐.
에덴은 아담만을 위해 지어졌고 아담은 에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었으며 릴리스는 마치 그곳의 동물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릴리스에게 세상은 곧 에덴이었고, 신의 의지 또한 그랬기에 릴리스는 자신이 아담의 아랫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녀에게 마계라는 또다른 세상이 주어지기 전에는 말이다.
***
"스네키가 말했어. 세상의 끝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던데! 놀랍지 않아? 오, 릴리스! 마침 잘됐다. 세상의 끝에 가서 진짜인지 보고와봐."
매우 불합리한 명령이었지만, 릴리스는 그 말을 따랐다.
'그러고 보니 스네키는 뱀인데.. 세상의 끝을 어떻게 아는 거지?'
잡다한 생각을 하며 에덴의 끝을 향해 걸어가던 릴리스는 불현듯 달라진 풍경을 마주했다.
'여긴.. 아담의 취향은 확실히 아니네. 에덴은 아담을 위해 만들어진 곳. 신들이 아담의 취향을 맞춰주지 않을 리가 없으니..'
"그렇다면 여긴 에덴이 아니야! 정말 또 다른 세상이 있었구나!"
놀라워하는 릴리스에게 남성체의 무언가가 다가왔다. 뾰족한 귀를 제외하고 전체적인 외형은 아담과 비슷했으나 밤색 눈과 머리카락을 지닌 아담과 달리 눈과 머리카락이 칠흑같이 검었고, 피부도 회색빛을 띠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릴리스양. 마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 마계에 거주하는 악마 스네키. 에덴에서 뱀의 모습으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악마..? 뱀을 대하듯 대답하면 되는걸까.'
"드디어 오셨다라, 마치 내가 이곳으로 오길 바랬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그렇습니다. 사실 어느 곳으로 가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에덴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응? 에덴이 왜? 릴리스는 갸웃했다.
"당신처럼 매력적인 존재가 에덴에서 썩어가는 모습은 더이상 보고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
그 말을 들은 릴리스는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살면서 아무런 자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타인에게 자신과 자신이 살던 세계가 어딘가 부정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다음 말을 듣기위해 릴리스는 악마의 입을 주목했다.
"당신은.. 일단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부디 따라와주시겠습니까?"
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악마는 가까운 마을의 광장으로 릴리스를 인도했다. 릴리스는 온통 돌로 이루어진 시끌벅적한 광장을 걸으며 에덴과 달리 마계엔 돌과 아담과 비슷하게 생긴 생명체가 많구나 라는 둥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릴리스는 다음에 펼쳐질 광경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야!! 내 이름이 앞에 오는게 맞다니까?"
"아니지! 내가 더 많이 잡았는데 당연히 내 이름이 앞에 적혀야지!"
"미친놈! 그렇게 따지면 니가 쓴 무기는 누구 거였는데?"
"그깟 무기 좀 쓴 것 가지고 드럽게 생색내네. 그리고 뭐? 미친놈? 이 년이 진짜 돌았나!"
'...?!'
광장 한가운데에서는 남녀 한 쌍이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매우 시끄럽게 싸우고 있있고
"걍 맞자. 일루와. 넌 내가 본때를 보여줘야 정신을 차릴 성 싶다."
"싫은데용? 꼬우면 잡아보시등가!"
'...???!?!'
다른 한 편엔 남성체 악마를 중심으로 혈투가 벌어질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근데 저 둘 부녀처럼 보이는데? 저래도 돼?'
여하튼 광장은 남들이 본다면 마을 치안이 왜저러냐며 기겁할 모습이었다.
".. ..큼. 릴리스양, 원래 이 마을이 평소엔 안 이런데.."
"여기, 뭐야? 어째서 저 여자는 주인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하고 있는 거니?"
하지만 릴리스는 광장의 모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네? 주인..말입니까? 설마 저 남자를 말씀하신겁니까?"
"그래! 심지어 주인의 머리채를 쥐어뜯다니? 설마 마계엔 주인이란 개념이 없는거야?"
놀랍게도 이 난장판을 평등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아.. 아뇨. 마계에도 주인이란 개념은 있습니다. 다만 남자라고 반드시 주인인 것은 아닙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스네키는 무언가 결심한 듯 분위기를 잡고 말했다.
"이곳 마계에선 오로지 힘만이 권력을 좌우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힘은 단순히 순수 근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말로 수만 명의 세력을 꿰어낼 수 있다면 말재주는 힘이라 할 수 있겠고, 미(美)력으로 마장군을 조종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힘이 되겠지요. 마계에서도 평균적으로 남자의 근력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마법이 가진 힘에 비하면 새발의 피와 같으므로 성별로 권력이 나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도 안돼. 그럼 여지껏 무시당해온 나의 삶은 뭐가 되는데!'
"제가 당신을 이곳에 데려온 것도 이와 관련된 이유입니다. 제가 봤을 때 당신은 다른 이들을 쉽게 포용하고 공감과 이해, 상황판단이 빠르며 이세계의 존재인 저 조차 홀린 말재주와 더불어 리더로서의 격이 있어 아담을 제외한 에덴의 모든 생물체의 선망을 받는 존재입니다."
'..이 악마는 뱀의 눈으로 살아가면서 눈꺼풀에 뱀비늘이 제대로 씌인 것 같구나. 그래도 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실제로 당신은 창조물의 신분으로 신을 설득하여 신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원숭이들을 용서하게끔 만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담은 현명한 그대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입에 대었으며 그대로 인해 용서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겨 감사하는 마음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감히 제가 아담을 평하자면 신의 사랑을 받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무뢰한이나 다름 없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의 신은 아담만을 사랑하지요."
'그나저나.. 뱀은, 이 악마는 저런 것 하나하나를 다 보고 있었단 말이야? 세심하게도.. 그런데 어째서 그런 짓을?'
흥분한 듯, 릴리스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그대로 바뀌어있었다. 스네키는 눈시울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릴리스. 그대는 그대가 에덴에서 악착같이 버텨가면서 아담의 밑에 있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언가의 감정이 가득 담긴 그 말을 듣는 순간, 릴리스는 자신에게 있어 에덴이 무너졌음을 직감했다. 애초에 릴리스가 여자는 남자를 섬겨야 할 존재라 여긴 이유는 칭송받는 아담과 무시받는 자신의 차이점이 성별 뿐이기 때문이었으므로.
***
물론 스네키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단지 에덴과는 다른 마계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겠지. 그래도 마계에서는 비교적 평화로웠던 마을이 난장판이 되어있었을 줄은,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릴리스가 그런 반응을 할 지는 그로써는 알 수 없었을테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이끌어낸 상황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눈을 릴리스에게 선사해주었고 스네키는 그 대가로 그가 그토록 바라던 릴리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릴리스는 그날 이후로 아담을 피하기 위해 갖가지 핑계를 대어 매일같이 마계로 도망쳤다.
'아담아니면 관심 없는 신 덕분에 이럴 땐 편하군. 언젠가 결국 들키겠지만.. 계속 미련하게 에덴에서 지내는 것보단 스네키 얼굴 한 번 더 보는 게 훨씬 나아.'
아담이 제게 동물 이상의 관심을 준 적 있었던가? 없다.
여기까지 프롤로그.
과거 동산 에덴의 땅에서 현재의 아르노셀 문명이 생겨났다는 설정입니다!
(정확히는 세여신이 주인을 잃은 에덴의 땅을 새로이 아르노셀 대륙으로 명명했다는 설정.)
+ 글이 조금조금씩 수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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