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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까마귀는 그림자 속에서.
- 2019.09.2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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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이 드리운 밤, 시종장 로렌스는 당혹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가 황실의 시종장으로서 근무한지 어언 20년차.
황제 폐하에 대한 것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였지만, 최근의 폐하는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궁과 궁 사이를 이동할 때에도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보시질 않나,
매일 밤마다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라며 시녀들을 곤란하게 만드시지를 않나.
심지어는 아침에 폐하의 기침을 위해 방문하면, 그 술은 마개조차 따지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지를 않나.
“오늘은 정말 말씀드려야겠어.”
로렌스는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11시….’
평소의 그였다면 진작에 방에서 쉬며 시가나 한 모금 피워댈 시간이었지만, 근래의 폐하를 생각하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건강을 염려하고 진언하는 것도 시종장의 업무이니 그가 아직 황궁에 남아 있다고 해서 질책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때, 복도 저편에서 얇은 실루엣 하나가 걸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로렌스는 눈쌀을 찌푸리며 복도 저편의 무언가를 응시했다.
몇 초 지나 서로간의 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먼저 상대방을 알아본 것은 실루엣 쪽이었다.
“로렌스 시종장님?”
황실 시녀복을 갖춰 입은 그녀는 한 손에는 램프를, 그리고 품에는 척 보기에도 고급인 와인 한 병을 안은 채 로렌스에게 다가왔다.
“한나 양? 여기서 뭘 하는 건가?”
다른 시녀들은 이미 하루 일과의 마무리에 들어가고도 충분할 시간이었다.
물론 야간 당직인 시녀라면 아직 깨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로렌스의 기억 상 눈 앞의 소녀는 오늘 당직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들의 업무와 일과를 관리하는 것이 본인의 일이니, 한나가 오늘 당직이었다면 자신이 알고 있어야만 했다.
“아, 황제 폐하께서….”
“아.”
한나는 말하기 껄끄러운지 말끝을 흐렸지만, 로렌스가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요 며칠간 있었던 ‘술 심부름’일 테다. 이 복도는 황제 폐하의 침실로 이어지는 복도니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로렌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게 맡겨라. 내가 가져다 드리도록 하마.”
우연히 맞딱뜨린 상황이였지만, 로렌스는 이 운 좋은 만남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 야밤에 황제에게 잔소리를 하러 가는 것보단, 무엇이라도 심부름 때문에 가는 것이 명목상으로도 괜찮았다.
최소한 문 앞에서 돌아가라며 문전박대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나의 대답은 로렌스의 예상과는 정 반대였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직접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허, 직접?”
한순간에 계획이 무너진 로렌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께서 굳이?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도 얼른 쉬고 싶을 테니 쓸데없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터였다.
애초에 오늘 당직도 아닌 그녀가 이 시간까지 초과 근무를 하고 있는 샘인데, 스스로 일거리를 늘리고 싶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럴 리는 없었다.
로렌스는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선택했다.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가지. 폐하께 말씀드릴 것이 있으니.”
“…그러시죠.”
한나는 그렇게 말하며 로렌스를 지나쳐갔다. 로렌스는 한순간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본 것 같았지만, 다시 확인한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것 없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넘어갔다.
뭐, 이 시간까지 심부름을 하고 있으면 화가 날 만도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뚜벅, 뚜벅.
긴 복도에 구둣발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근심에 찬 얼굴로 복도를 걷는 로렌스를 보다못한 한나는 나직히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음?”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낸 로렌스는 반사적으로 한나를 돌아보았다.
늘 차가웠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한순간이나마 램프의 불빛에 반사되어 따뜻함을 품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로렌스는 큼,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태연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요즘 폐하의 용태가 이상해서 말이야. 본래 이런 야밤에 술을 즐기시지는 않던 분인데.”
“하지만 드시지는 않으신다던데요.”
“그렇지.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다. 드시지도 않을 술을 매일 준비하라 명하시니…”
로렌스로서도 뚜껑조차 따지 않고, 매일매일 와인을 저장고에서 넣었다 뺐다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대한 제국께서 하시는 일이니 무언가 의미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래서야 겉으로 보기에는 시녀들을 괴롭히는 것 이외에는 목적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뭔가 뜻이 있으시겠죠. 예를 들면 친구를 기다린다거나, 하는.”
“친구? 허, 이 밤에?”
로렌스는 코웃음쳤다. 이 밤에 만나러 올 친구가 있겠는가.
굳이 황제 폐하가 아니더라도 이 시간에 만나러 오는 것은 손버릇 나쁜 살쾡이들이지, 친구는 결코 아니었다. 도둑들을 ‘밤의 친구’라고 일컫기도 한다는 모양이지만, 이곳은 황궁이다.
그것도 황제 폐하의 침실이 코앞인 이곳은 이 제국, 나아가서는 이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경비가 삼엄한 곳일 것이다.
그믐날도 아니고, 달의 여신이 세상을 주시하는 이 보름날에 도둑 따위가 황궁에 침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식적인 만남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누가 감히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겠나? 다른 나라의 왕이 직접 온다고 해도, 이 시간에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는 없을 것이야.”
“나라의 왕이 아닐 수도 있지요.”
한나의 말에 로렌스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머지않아 피식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나라’의 왕? 하하, 그렇군. 그 전설 속의 큰까마귀라도 온다면 또 모르겠어.”
큰까마귀. 까마귀의 왕인 레이븐(Raven)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못 들어가는 곳, 못 훔치는 것이 없다는 전설의 밤의 왕이라면 이 황궁에도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로렌스의 말에 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든 램프가 흔들려서, 그림자 하나가 살짝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큰까마귀라면, 그 ‘까마귀’들의 왕 말씀이신가요?”
“그래. 레이븐이라고 부르지.”
로렌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계속 정성스럽게 이 시녀의 물음에 대답해 주는 자신이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초과 근무를 하는 시녀를 향한 자비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무튼, 아무리 그래도 이곳까지 오지는 못할 게다. 그게 천하의 레이븐라도 말이야! 오래 전에야 침입한 적이 있다는 것도 같았지만, 그 후로 우리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로렌스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한나를 바라보았다. 한나는 무슨 이유에선가 표정이 어두워 보였지만, 그것은 아마 이 황궁의 경비 체제를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수십의 마법사를 통해 24시간 돌아가는 마법 결계와 함정, 단 한순간조차도 틈이 없는, 심지어 경비 교대 시점조차도 완벽한 기사들의 경계. 그리고 이 이외에도 비밀스러운 경비 수단이 수십 가지나 존재했다.
사람들의 예상 이상으로 이 황궁은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리고 로렌스는 시종장으로서 그 모든 것들을 숙지하고 있었기에, 설령 그 누구라고 하더라도 이곳까지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암. 아무리 까마귀라도 불가능한 일이지.”
까마귀를 아는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이를 그들에 대해 모르고서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시종장으로서 제국의 어두운 뒷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었고, 까마귀들 또한 실제로 만나본 적이 있었다.
‘그림자 속을 걷는다’라는 것이 비유가 아닌 현실 그 자체를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정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만, 황실의 경계는 그 이상임을 알고 있었다.
그 둘을 비교해 놓고 보았을 때, 로렌스는 이렇게 판단했다.
‘성벽을 넘을 수는 있어도 황제 폐하의 침실까지는 오지 못한다.’
확신에 찬 로렌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한나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착했네요.”
로렌스는 대답 대신 침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문틈 사이라 촛불의 빛이 새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황제는 아직까지도 깨어있는 듯이 보였다.
예상대로이긴 했지만, 로렌스는 그래도 역시 걱정이 앞섰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으신 게야.’
로렌스는 침음을 삼키며 방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작은 노크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폐하, 로렌스입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들려왔다. 낮으면서도 진중한, 위엄있는 목소리였다.
“…들어오라.”
로렌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고리를 당겼다.
들어가자마자 작지만 따뜻한 빛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운 촛불과 함께, 아직까지도 정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가 보였다.
“….폐하.”
“무슨 일이지? 충성을 바치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몸을 망쳐서야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자네가가장 자주 하는 말 아니던가.”
‘지금 그 말을 폐하께 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로렌스였지만, 애써 꾹 참고는 우선 명령을 이행하기로 결정했다. 잔소리를 하건, 진언을 하건 우선 술을 가져온 시녀를 돌려보내 주어야 할 테니까.
“한나가 술을 가져왔습니다. 직접 가져오라고 명하셨다 들었습니다.”
“한나? 직접? 로렌스, 자네 무슨 소리를…”
황제는 눈쌀을 찌푸리며 로렌스를 쳐다보았지만, 뒤에서 술병을 들고 있는 한나를 발견하고는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잠깐 실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로렌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랬지. 맞아. 그랬었어.”
무릎을 탁 치는 황제를 로렌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말 불경한 생각이지만, 혹 치매가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로렌스는 근심어린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폐하. 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겁니까? 제가 현명하지 못해 폐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뭘 하고 싶은 겁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말 그랬다가는 ‘멍청한 짓 좀 그만 해’를 공손히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조금 돌려 말한 로렌스였다.
하지만 황제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로렌스에게 되물었다.
“기다리던 사람이 지금 왔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예?”
로렌스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은 아닐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한나를 기다렸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면, 이틀 전부터 한나를 시켰지 굳이 오늘까지 시간을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렌스는 정말로 근심 어린 눈빛으로 한나를 돌아보았다.
“한나, 일단 술은 내게 맡기고 돌아가서 쉬…”
어라.
그러나 로렌스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뒤돌아 섰을 때, 방금까지 이곳으로 같이 걸어왔던 시녀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말 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허공으로 내뱉어진 말은 끝맺어지지 못하고 흩어졌고, 당황한 로렌스의 시선이 황제 앞에 당당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를 발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걸로 적당히 골라 왔어. 괜찮지?”
“암, 괜찮고 말고. 왜 늦나 했더니, 그동안 준비했던 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황제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나는 그런 거 안 좋아해. 술은 자고로 단 맛이 있어야지.”
“하하, 다음부터는 꼭 최고의 화이트를 준비해 놓지. 25년산으로.”
자연스럽게 뚜껑을 비틀어 따고,
“황제 폐하 통이 작으시네. 100년산 같은 거 없어?”
“우리 아버지도 드린 적 없는 술을 달라고 하는구만. 고얀지고.”
자연스럽게, 잔에 술을 따르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눈앞의 광경에 로렌스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설령 황후 마마라고 할지라도 저토록 자연스럽게 농을 나누지는 못할 것이다.
“하, 한나….무, 무슨 짓이냐!!”
로렌스는 기함하며 한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작은 미소를 드리우며 잔을 기울여 향을 음미했다. 퍽 만족스러운지 그녀는 맑은 웃음을 지으며 한 모금, 조용히 와인을 머금었다.
“좋은 술이네. 역시 내 센스란.”
“독 같은 것은 확인하지 않는 건가?”
황제는 자화자찬하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말해 보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머금은 술을 삼켰다.
“재밌네. 당신이?”
“후후, 농일세. 나이를 먹으니 농담도 재미없는 것 밖에 하지 못하게 되는구먼.”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은 마치 십년 지기의 친구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에게 그런 친구가 있을리도 만무하거니와, 보기에 한나의 나이는 많아도 스물 중반을 넘지 않을 것 같이 보였기에 당혹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녀가 잔을 반쯤 비웠을 때쯤, 촛불에 술을 비추어 반짝임을 음미하던 그녀 대신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곧, 아르노셀 대륙 연합의 창설을 발표할 걸세.”
“뭐, 당연히 그렇겠지. 그 예언자 영감이 판을 벌려놓은 이상, 민중을 가라앉히기엔 ‘영웅’만큼 멋진 이야기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는 투로 술잔을 한번 더 기울였다. 그러나 듣던 로렌스는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위브릴의 공세가 위협적이라고 한들 다른 나라들의 이해관계를 전부 업고 대륙의 연합이라니. 그것이 가능케 하려면 얼마나 많은 서신과 얼마나 많은 거래가 오가야 할지, 자신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을 시종장인 자신도 모르게 성사했다고 한다.
방금 전까지 황제의 치매를 의심하던 로렌스는 스스로가 죄스러워졌다. 제국의 태양은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여전히 건재했으며, 시종장이 되어서도 자신은 여전히 그의 힘이 되기엔 모자랐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나를 부른 건가? 장장 40년 만에 말이야.”
“안 불러서 서운했나? 하지만 자네가 부른다고 오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으음…”
말문이 막힌 그녀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짓던 황제는 품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어 내밀고는 말을 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의 명단일세.”
약 열 장 정도 되어 보이는 양이였다. 얼핏 보기에 한 장에 스무 명 정도 되는 이름이 적혀 있었으니, 이백 명 정도 분량의 서류일 테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곤 몇 장 팔락거려 넘기더니,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이름 뿐?”
“자세한 자료는 자네들도 있지 않나.”
“거, 비싼 걸 요구하시네…뭐, 좋아.”
그녀는 서류를 둘둘 말아 태연하게 품 속에 집어넣었다. 방금의 대화에서 어떤 이해관계가 오간것인지는 로렌스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이해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말해두는데, 그 예언자 영감 때문에 우리 일이 좀 많이 틀어졌어. 의뢰비는 비싸게 받을 거라고.”
“화이트 100년 산을 준비해 놓지.”
“…당신, 어릴 때는 그렇게나 순수했는데 이제는 그냥 날로 먹을 생각을 하네. 그러다 배탈 난다.”
“그러는 자네는 여전히 변한 것이 없어. 허허.”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지만, 황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녀는 무어라 더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어젖히더니, 한 순간 그녀의 옷 위에 검은 로브가 덧씌워졌다. 그것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마치 달빛의 그림자가 옷으로 변한 것 같이 보였다.
그녀는 로브의 양쪽 끝을 손가락으로 집어올리고는, 다리를 꼬아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흠 잡을데 없는, 멋들어지기 그지없는 궁중 예법이었다.
그리고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었다.
그리고 나직히 읊조렸다.
“그럼, 위대한 제국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쏴아아아!
직후, 마치 그것이 마법의 주문이 된 것만 같이 그녀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반짝이는 검은색 깃털만이 나풀거려 떨어지고 있었다.
비유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 순간 로렌스의 뇌리에 한 문장이 스쳐지나갔다.
‘까마귀는 그림자 속에서 걷는다.’
그리고 로렌스는 직감했다. 황제가 ‘기다린’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한나’였고, 그가 기억하기로 한나는 몇 년 전부터 황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꽤나 경력 있는 시녀였다.
로렌스는 가장 간단하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녀가 떠나가고 수초 후, 황제가 잔에 새로이 술을 따르고 있을 때 즈음 그동안 석상같이 서 있던 로렌스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폐, 폐하. 그 자는…”
“자네가 직감하는 그 사람이 맞다.”
황제는 그리 말하고는 아까 그녀가 한 것처럼 잔을 돌리며 술잔의 빛을 감상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로렌스의 의문에 해답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한나였습니다! 한나는….!”
“한나는?”
황제가 무심히 대꾸했다.
한나는.
단순한 물음이었다.
‘한나는 누구지?’
다른 누구도 아닌 로렌스에게는 정말이지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는 시종장으로서 황궁의 시종과 시녀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엠마, 막심, 허턴, 아부가르드— 시종 시녀 뿐만 아니라 왕실 관료들의 이름들까지 한순간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히 각인되던 ‘한나’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자네는 정말 그녀를 아나? 내 궁전에 ‘한나’라는 아이가 있었나? 기묘한 일이군, 나는 그런 이름의 시녀를 아는 바가 없건만.”
“바, 방금까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하지만…”
로렌스는 말문이 막혔다. 방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이건만, 그녀가 떠나간 지금은 한 줌의 기억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네를 위한 충고일세. 오늘 밤 일은 그냥 모른 척, 세월에 흘려보내는 것이 나아. 까마귀의 왕은 흥미로운 것을 좋아하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까마귀들은 그렇지 않거든.”
황제는 쐐기를 박았다.
이미 로렌스 본인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충격적인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충격이 쉽게 가시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비로소 인정했다.
밤의 왕, 까마귀의 수장.
그는 오늘 밤, 레이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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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서술 트릭을 써 보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잘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네요, 일부러 알기 쉽게 쓰기는 했지만 시종장과 레이븐이 같이 걷는 장면에서 구두 소리가 뚜벅이는 소리(남자 구두 소리) 하나라던가, 불빛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하나라던가 하는 식으로 표현해 보았는데요~ 역시 조금 어렵네요! 여기까지는 개인 서사였고, 다음부터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무언가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맛집 탐사라던가? 그리고 그 이후의 글에 무언가 행동을 남겨 주시면, 어쩌면 이 이후에 이야기에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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