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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머나먼 과거, 인류 문명 초기의 시대.

  • 2019.09.27 07:11
  • 조회수98

문자에는 많은 것이 담긴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간단한 지시와 대영웅의 서사시까지.


정보를 끌어모아 담는 이 '문자'라는 체계에 내 평생을 바쳐왔다. 80년이라는 세월을.


우리 신민들에게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을 선물해주기 위해. 궁정 기술자로 지내며 왕이 7번이나 바뀌었음에도 난 한결같은 목표를 유지해왔다.


지금은 이 작은 점토판에 얼마 되지 않는 내용만을 새길 수 있을 뿐이지만, 머지 않아 우리의 후손들은 더 많은 정보를 더 가벼운 매체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새벽, 궁정 지하실에서는 대기중의 마력을 문자에 불어넣어 활용하는 실험이 진행될 것이다. 이 '마법'이라는 기술이 성공한다면, 우리들은 새로운 자원을 가지고 그동안 시달려왔던 야수, 마수들에게도 대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동안 가르쳐온 제자들의 얼굴도 오랜만에 볼 수 있겠지.


역사의 방향은 우리들이 바꾸게 될 것이다.



피로에 좋다는 차 내음이 사무실에 풍긴다. 펜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손에 묻는 것도 모르고, 동료 서기가 가져온 실록의 초본을 열심히 옮겨적는다.


왕립 기록관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몸 쓰는 일을 피해서 들어온 나같은 게으름뱅이들은 마지 못해 일하곤 한다. 기밀을 보관하는 시설이니만큼 한 번 취직하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담아야 하니까. 함부로 탈출했다고 하면 목 위 부분이 날아간다는 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문'이 열린 이후로 왕궁 내부가 더 바빠지면서 자연스레 우리의 일도 늘었다. 몇몇 동료들은 퇴근한지 6시간도 안되어 다시 불려나올 정도가 되었고, 자정 이전에 퇴근하는 사람이 없어질 지경이 되었다.


나의 퇴근길에도 달빛이 흐리게 빛을 낸다. 오늘은 특별한 짐이 있어 소가 끄는 수레를 탔다. 말 수레를 타기에는 짐이 너무 무겁고, 말의 빠른 속도에 의지했다간 이 짐짝이 부서질 것이다. 새벽녘의 추위가 엄습해오고, 혹시 모른다는 희망감에 아직까지 불이 켜진 가게가 있나 찾아보지만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얼음장같은 손을 싹싹 비비며 입김으로 녹여볼 뿐이었다. 뜨듯한 소의 등이 그나마 오늘의 위안이 되어준다.


...왜? 어째서?


분명 실험은 성공했다. 이제 우리들은 마력을 효율적으로 쓰는 법을 알게 되었고, 우리 왕국의 문명이 가여운 시민들을 계몽할 수 있게 되었다.


어째서 나와 내 제자들은 처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가?


안락한 침대보다도 책이 펼쳐진 책상에 엎드려 죽고 싶어했던 우리들이, 책상은 커녕 처형이라고ㅡ


뭔가 잘못되었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고, 일어나리라고 상정한 사람 역시 적어도 우리 중엔 없었다.


우리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적어도 우린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간신히 들어온 집안 역시 차갑긴 마찬가지다. 혼자 사는 집의 난로는 으레 그렇기 마련이다. 장작을 넣고 불을 붙이는 과정까지도 번거롭거니와 그렇게 극적으로 따뜻해지는 것도 아니다. 난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차가운 바닥 때문에 발바닥이 당겨온다.


평소 같으면 작은 온기에라도 기꺼이 만족하며 잠을 청하겠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중지되었던 고대 왕국의 사료 분석이 곧 다시 진행된다기에, 사료를 분류하고 묶음식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아까 언급한 특별한 짐이 그것이다. 수천 년 전에 브리크리덴 서북부에 존재했다던 왕국의 기록이 담긴 점토판이다. 점토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문명이었고, 최초로 문자를 이용해 기록물을 남기고 마술 체계의 정립을 시도한 역사적인 문명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아무리 위대한 기록이나 전설이라도 내게는 휴식을 앗아간 가증스러운 녀석일 뿐이다.


우리들의 몸이 구덩이에 한꺼번에 쏟아지고, 노력의 결실이었던 점토판이 같이 굴러떨어져 제자 한 명의 머리를 으스러뜨렸다.


상황을 이해할 여력은 없었다. 칼에 맞아 생긴 상처로 피가 이미 상당량 나와버렸다.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직감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었다. 마른 장작과 기름이 쏟아지고, 우리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평생을 함께한 왕국에게서 잊혀졌다.


마도구가 모인 서랍에서 감별용 돋보기를 꺼내고, 사료를 망치지 않기 위해 특수처리된 흰 장갑을 꺼내 착용한다. 문자 해석표가 빨리 만들어지길 바라며 오늘도 손수 노트를 꺼내들고 번역 작업부터 시작한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휴가를 내고, 그동안 바빠서 찾아가지 못한 시립 고아원에 봉사를 가야지. 언제 또 바빠질 지 모르니..."


문자에는 많은 것이 담긴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간단한 지시와 대영웅의 서사시까지.


마력까지도 담아내는 이 체계에 영혼만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우리의 육신이 불타고 썩어 문드러질 동안, 우리를 파묻은 흙이 걷어지는 억겁의 시간 동안, 우리는 흐릿하게나마 깨어있었다. 점토판에 새겨진 쐐기 문자에는 이젠 각자의 사념과 왕국을 향한 저주가 남았고, 복수의 불꽃은 그 오랜 세월동안 꺼지지 못하고 하나의 재앙이 되었다.


죽어야 했을 목숨이 얼마나 부지된 건지, 드디어 한 무고한 영혼 하나가 '나'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글을 읽는 똘망똘망한 목소리를 잊고 그동안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지냈는가? 이미 사라진 왕국을 향한 분노? 아니다.


새로운 삶을 바란다. 온 대륙을 통치할 새로운 나라를 원한다. 모든 지식을 총괄할 새로운 체계의 구축을 원한다. 이 변질되어 썩어가는 영혼에게 그 이상의 구원은 없다. 배신한 왕국에 대한 복수심은 이미 세계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뀌었고, 응어리진 원한이 담긴 알 수 없는 마력이 눈 앞의 죄 없는 청년을 덮친다.


난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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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2019.09.27 07:13
    인간은 참 알수없는 무언가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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