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 에 대한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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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피지 위를 움직이는 조용한 깃펜 소리만이 어두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방을 밝히는 것은 전혀 없다. 빛이라고는 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작은 불빛뿐이었다. 만약 이 사각이는 깃펜 소리마저도 없었더라면, 이 공간에 누군가 있는 것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문 틈새로 비추어지는 빛에 나지막히 드러나는 거대한 까마귀 모양의 벽 장식은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구태여 설명은 필요하지 않으리라. 이 브리크리덴의 밤을 지배하는 까마귀는 언제나 단 하나. ‘레이븐’이라 불리우는 오직 그녀 단 한 명 뿐이었으니까. “하아…” 그러나 레이븐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그놈의 예언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며칠 전, 대예언자 세다크가 한 예언. 결국 전부 그게 문제였다.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 좋다. 영웅들을 모으는 것? 그것도 좋다.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좋은 일 한다고 탓할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시기였다. “굳이 나서서 일 크게 벌리지 않아도, 이미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레이븐은 입술을 악물며 탁상을 쾅, 내리쳤다. 위브릴 왕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런 정보는 방구석의 마법사나 예언자가 아니라, 언제나 새와 쥐가 먼저 듣는 법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전쟁은 언제나 돈이 되기에, 위브릴과 그 주변의 정보를 모으기 위해 한 물밑 작업이 몇 달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마계의 문? 물론 위협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까마귀들이라고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레이븐을 위시로 까마귀들은 각국의 세력, 지형, 전황들을 가지고 나흘 밤낮을 계산했고, 결국에는 마계의 문에서 무엇이 나오든 브리크리덴과 케임드웨이브 사이에서 멈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희생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브리크리덴과 나우르는 그것을 복구할 충분한 여력이 있을 테니 이제 남은 것은 그 사이에서 줄을 타며 전장을 조율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소집령이라니, 팔자도 좋군…!” 실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대처였다. 차라리 다른 왕궁과 신원이 확실한 영웅들에게만 은밀히 사자를 보내 소집시켜야만 했다. 지금 온 대륙의 정세가 어떤지 그가 알기나 할까. 온갖 종말론이 떠돌고, 피난한다는 사람들이 즐비해 정보 수집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써던작가페이지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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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그가 이곳에 머무른지 어느덧 보름이 다 되어간다. 최전방이자 국경선인 이곳은 혼란 그 자체이며, 시시각각 영토가 바뀌는 희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제 연합의 땅이었던 곳이 오늘 마물에 집어삼켜졌다. 사령관들의 늘어가는 흰머리가 현 전쟁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그와 오랜 면식이 있는 나우르의 레이븐 장군 역시 그러했다. "오랜만이군, 2년쯤 되었나?" "아, 제른하르트씨. 오랜만입니다. 당신이 이 전선에 계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 벌써 보름째 이러고 있군. 전선이 이곳만 있는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전 가장 정신없는 곳은 이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우르니까요." "음. 나우르니까." 둘 모두 나우르 출신이기에 동의하는 말이었다. 놀라울 만큼 호전적이며 강한 이곳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평범하게 죽는걸 마물 수천마리에게 둘러싸여 고문당하며 죽는것보다 더 두려워 하는 자들이었다. 모두가 그러진 않겠지만 다른 지역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그럴것이라는 것에 대해 그들은 이견이 없었다. "못 본 사이에 나이가 꽤 많아졌군. 지금 얼마나 되었나?"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났습니다. 서른 넷이지요." 그는 이 말을 듣고 꽤나 놀랄수밖에 없었다. 그가 34세나 되었다는 사실에 놀란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의 주름과 흰머리의 수는 족히 마흔은 되어야 볼 수 있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안이 되었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곧 있으면 널 나랑 동년배로 보는 사람도 있을것 같군." 레이븐은 쓴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제가 일반 병사였다면 이 목숨 다해 싸우다 죽으면 되는 일이겠지만... 이 지휘관이라는 지위가 절 그렇게 할 수 없도록 하더군요. 왜 당신께서 이런 직책을 거절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음... 꼭 내가 떠맡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나?" "아뇨, 사과를 듣기 위해 한 말은 아닙니다. 진심으로, 이 직책이 마음에 들진 않거든요.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겠죠." 그 말에는 제른하르트도 쓴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저버리고 떠난 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때 울린 경보에 그는 이 화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담은 이정도로 하지. 손님들이 오신 모양이야." "그러게요. 그 손님들이 제가 이곳에 온 첫날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방문해Iuse작가페이지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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